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마스 크랜머 (문단 편집) === [[헨리 8세]]의 조력자가 되다 === [[헨리 8세]]는 본래 왕위 계승자였던 형 [[아서 튜더|아서]]가 요절함으로써 자연스레 왕위를 이어받음과 동시에 형의 아내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아라곤의 캐서린]]과 혼인을 맺게 되었다. 이 둘의 결혼은 곧바로 [[교황청]]에 의해 교리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캐서린은 이에 대해 자신은 전 남편 아서와 부부 관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라고 주장해 교황청은 이를 허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헨리 8세와 캐서린은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얻었지만, 훗날 [[메리 1세]]가 되는 딸 하나를 제외하고 남은 자식들은 모두 일찍이 잃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살리카법]]을 따르고 있었고, 이에 따라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왕은 왕비에게서 무조건 아들을 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이미 50살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던 상황이어서 더 이상 후사를 기대하기 힘들자 헨리 8세는 이를 [[야훼|하느님]]의 분노라고 여겨 캐서린과의 혼인을 애초에 없었던 일로 무효화하는 선언을 받고자 교황청에게 접근을 했다. 혼인 무효 허가를 받아 이혼이 정당화되면 새로운 왕비를 들여 자신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점차 커져 끝내 소송전으로 발전했고 헨리 8세와 캐서린 간의 공방이 펼쳐졌다. 이에 국왕은 혼인 무효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토머스 울지|울지]] 추기경에게 종교적 근거들을 물색하는 조사를 맡겼고, 추기경은 대학 출신 인물들로 조사단을 꾸려 해당 임무를 착수했다. 토머스 크랜머도 조사단의 일원 중 한 명이었으며 국왕의 혼인 무효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양한 근거들을 마련하는 데에 일조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529년 교황청은 재판을 무기한으로 연기하거나 [[로마]]로 직접 와서 시비를 가리라고 표명했다. 사실상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탄원이 교황청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국왕은 울지 추기경을 재상에서 파면하고 그 후임으로 [[토머스 모어]]를 임명했고, 자신을 위해 혼인 무효에 근거들을 제공한 개혁적 성향의 인물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해 [[케임브리지(영국)|케임브리지]] 일대에 전염병이 퍼지자, 크랜머는 자신의 친척들과 함께 [[에식스주|에식스]] 지방에 있는 월덤 수도원으로 잠시 피신해 있었다. 어느 날 조사단 동료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가 그가 있는 곳으로 방문했고, 그렇게 모인 세 사람은 혼인 무효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크랜머는 교황청과의 법적 문제는 제쳐 두고 우선 유럽 전역의 대학 신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지지층을 얻자고 제안했다. 가디너와 폭스는 곧바로 헨리 8세에게 그의 제안을 전달했고, 자신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던 혼인 무효 문제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국왕은 이에 큰 흥미를 느껴 새로운 재상과의 협의 끝에 이를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크랜머는 여러 대학 측으로부터 의견들을 얻기 위해 국왕을 위해 소송을 도왔던 측근들이 있는 로마로 떠났고, 그곳에서 그는 이들과 함께 《충분히 풍부한 모음집(Collectanea satis copiosa)》을 저술했다. 해당 글은 헨리 8세 개인과 잉글랜드 왕국의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정당화하는 신학적·역사적 논거를 각종 문헌에서 찾아내 편찬한 모음집으로 [[수장령]]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크랜머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종교 개혁자들과 접촉을 했는데, 그는 [[스위스]] [[바젤]]에 머물고 있던 [[독일]]의 신학자 지몬 그리나이우스와 더불어 [[울리히 츠빙글리]],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등의 유명 종교 개혁 운동가들로부터 헨리 8세의 혼인 무효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얻어 냈다. 이들 중 크랜머의 열정에 감탄한 그리나이우스는 1531년 잉글랜드 왕국에 직접 방문해 국왕과 종교 개혁가들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이 일을 기점으로 크랜머와 그리나이우스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으며, 크랜머는 자신의 새로운 친구 덕분에 [[스트라스부르]]와 스위스에 머무는 많은 종교 개혁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 1532년 1월 헨리 8세의 신임을 크게 얻은 크랜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하는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황제는 자신의 영토를 한창 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황제가 잠시 머물고 있던 [[레겐스부르크]]로 떠났다. 레겐스부르크로 향하던 중 크랜머는 [[마르틴 루터]]의 개혁적 기질이 짙었던 [[뉘른베르크]]를 들렀는데, 그곳에서 그는 종교 개혁의 영향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뉘른베르크에서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가 개회되자, 황제를 따라 도시를 방문한 그는 그곳의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였던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만났다. 깊은 신학적 대화를 나눈 둘은 금방 사이가 가까워졌고, 그 해 7월 크랜머는 오시안더의 처조카 마르가레테와 결혼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사제였던 크랜머는 당시 성직자의 독신이 엄격하게 강조되었던 시대상으로 인해 마르가레테를 자신의 정식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